산림과 산불

미국 원주민들의 문화적 소각과 산불, 그리고 화전민

forests 2026. 4. 20. 16:18

미국에서, 특히 미국 북서부인 Parcific Northwest(오리건 + 워싱턴 주)에서 산불을 공부하다 보면 미국 원주민들의 문화적 소각(cultural burning)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게 된다.(cultural burning은 전통 소각, 관습적 불놓기 등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문화적 소각으로 쓰려 한다.) 현대인들에게 미국 원주민들이 초원이나 숲 속에 의도적으로 산불을 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아니 일부러 산불을 내다니!) 하지만 미국 원주민들은 실제로 사냥이나 종교적인 목적으로 자연에 불을 냈다.

 

찰스 러셀(1864–1926)이 그린 북미 원주민의 모습

 

원주민들의 문화적 소각은 단순히 식량을 얻으려는 행위를 넘어 생태계의 일부였다고 인식된다. 불은 열매와 씨앗, 새순, 사냥감을 늘리는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약초와 바구니 재료, 의례에 필요한 식물들을 돌보는 방법이기도 했다. 어떤 부족들에게 불은 단순한 관리 기술이 아니라 땅의 균형을 맞추고 다음 세대에 지식을 전하는 책임 있는 실천이었다. ‘불은 약’이라는 말처럼, 불은 숲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행위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는 유럽인들의 북미 이주 이전의 어떤 짧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천 년간 이루어진 원주민들의 관습이며, 북미의 자연은 문화적 소각과 함께 진화해 왔다.

 

그런데 19세기 말 유럽인들의 북미 이주와 원주민 강제 이주가 본격화되면서 이런 불놓기 관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서부 개척에 대량의 목재가 필요했던 유럽인들은 당연히 원주민들의 불놓기 관습을 미개하게 생각하고 금지했다. 그 결과는 1910년 아이다호와 몬태나에 걸쳐 발생한 산불, Big burn이다.

 

티모시 이건의 책 <빅 번>, 미국 산림청이 어떻게 탄생했고 1910년 '빅 번'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아주 지루하게 다루고 있다. 읽느라 아주 힘들었다. (출처: https://onland.westernlandowners.org/2025/country-bookshelf/page-burners-the-big-burn-by-timothy-egan/)

 

이 산불이 얼마나 컸는지 미국인들은 그냥 '빅 번'이라고 하면 알아듣는다.(물론 잘 모르는 사람도 있다. 미국인들은 좀 무식하니까... 농담이다.) 2~3일 동안 80여 명이 죽고, 1,210,000 ha가 탔다고 한다. 2025년 3월에 발생한 경북 산불 면적이 100,000 ha 정도라고 하니, 며칠만에 그 12배가 탄 것이다. 빅 번이 발생한 이유는 문화적 소각이 금지되자 숲의 나무들이 계속해서 증가했기 때문이다. 산에 나무가 많으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연료(fuel, 탈것)가 계속해서 쌓이는 것을 의미하고, 산불 위험성이 계속해서 증가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원주민들이 꾸준히 작은 규모로 불을 냈던 것이 산림의 적당한 나무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고, 그것이 산림을 산불로부터 지켜왔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처방화입(prescribed burning)을 하고 있다. 숲에 미리 불을 내서 탈 나무들(연료)을 줄여 산불 발생 가능성을 줄이고, 산불이 발생하면 산불의 강도를 낮추도록 하는 것이다. 원주민들이 했던 문화적 소각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드립 토치(drip torch)를 이용해 prescribed burning을 하고 있는 산불진화대원의 모습 (출처: Oregon State University Extension Service, https://extension.oregonstate.edu/catalog/pub/em-9344-managing-prescribed-burn)

 

 

한국에서 북미 원주민들과 유사한 존재는 어쩌면 화전민이 아닐까 한다. 나는 도시문헌학자인 김시덕 선생을 통해 화전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한국일보 칼럼, <울창한 산림의 뒷면, 한반도 화전문명의 소멸>. 일독을 권합니다.) 대중음악에 나올 만큼 한국인들에게 친숙했던 화전민이 농업 중심적 세계관과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아마도 현대 사람들은 (화전민이 무엇인지 안다면) 산림녹화사업을 위해서는 산림을 훼손하는 화전민들을 정리해야만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경북대학교의 신동일 선생은 2023년 발표한 논문에서, 화전민이 산림을 훼손하는 주범이었다는 일반적 인식과는 달리, 50년대 미군정의 보고서와 60년대 산림청의 <화전정리사업>을 근거로 산림 훼손과 산불 발생과 화전민은 큰 관계가 없었음을 밝혔다.(신동일님의 논문 <보호에서 배제로: 박정희 정부 시기 경계인으로서의 화전민 표상과 화전정리사업>, 역시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다.)

 

산림청의 화전정리사업으로 자신의 집을 떠나는 화전민의 모습.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화전민의 아픔이 느껴진다. (출처: 김시덕 선생의 한국일보 칼럼에서 재인용)

 

다시 김시덕 선생의 칼럼으로 돌아가면, 흥미롭게도 화전민들의 삶의 양식을 농민과는 다른, '산민'이라는 또다른 문명으로서 보는, 내게는 다소 대담한 주장을 한다. 그러니까 화전민은 "산에서 농사 짓는 농민"이 아니라 "평야의 농민과 산속의 화전민은 살아가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집단이"라는 것이다. 화전민의 삶의 방식을 유목민에 비유하고, 또한 전혀 다른 생존 방식을 지녔다고 주장한다.(자세한 내용은 칼럼 참조) 그러니까 산림청 직원들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져온 '산민 문명'을 파괴한, 어쩌면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제임스 스콧의 책,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 이것 역시 읽느라 힘들었다.

 

김시덕 선생의 산민 문명으로서의 화전민에 대한 인식은 제임스 스콧이 주장하는 '조미아'와도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제임스 스콧에 따르면 조미아란 "베트남의 중부 고원에서 시작해 대륙 동남아시아 5개국(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과 중국의 네 지방(윈난, 구이저우, 광시, 쓰촨성 일부)을 가로지르며 인도 동북부까지 뻗어 있는 고지대"를 말한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언어를 쓰는 1억명 가량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문명과 동떨어진 '미개'한 민족이라는 흔한 인식과는 달리 "국가의 폭정과 노역을 피해 달아난 탈주자, 도피자, 도망노예들의 후손이다."(경향신문) 어쩌면 화전민들은 단순히 논밭이 없고 가난하며 미개한 존재가 아니라, 조미아의 주민들처럼 국가라는 '정주강도(stationary bandits)'를 피해 산 속으로 들어간 자유인인지도 모르겠다.

 

철거번호를 들고 있는 화전민 가족. 금간 집 앞에 앉아 원망과 체념이 섞인 듯한 어머니의 표정과 해맑게 웃는 딸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남편은,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출처: 충북인뉴스)

 

미국에서는 산불과 원주민의 문화적 소각이 북미 생태계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는 데 열심이다. 나무의 나이테에 담긴 산불 흔적(fire scar)을 통해 해당 지역의 산불이 발생한 연도와 시기, 산불의 강도와 빈도를 추정한다. 나이테 중 조재(earlywood)나 만재(latewood)에 산불이 발생했는지에 따라 봄-초여름인지, 늦여름-초가을인지 알 수도 있다.(물론 여러 한계가 있다.) 그리고 산불과 생태계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경관을 구성해 왔는지 연구한다.

 

나무의 나이테에 고스란히 산불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 출처(Paredes at al.)

 

어떤 불은 생태계의 일부로 기억되고 처방화입이라는 현대의 기술로 모방된다. 한편 어떤 불은 비문명과 산림 훼손의 상징으로 낙인찍혀, 사회는 그 사람들의 삶까지 함께 지워버린다. 하지만 둘 다 인간의 오랫동안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만들어 온 생활 양식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미국 원주민들이 문화적 소각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혔던 것처럼, 한국의 화전민들 역시 산과 불 속에서 나름의 질서와 감각을 길러 왔던 것은 아닐까. 화전민의 삶에는 국가와 산림 행정의 언어로는 끝내 다 설명되지 않는 어떤 세계가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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